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학교에서 집단 폭력을 당하던 아이가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자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요. “친구끼리 장난 좀 친 거 갖고 왜그래?” 피해자가 오히려 꾸중을 듣고 혼나는 상황.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비현실적인 드라마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들의 방관으로 더욱 고립됐다는 말을 많이 해요. 폭력에 방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운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니 지위나 권력을 이용한 괴롭힘, 갑질 문화는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2021년 한 노동자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망한 사건, 기억하시죠. 피해자 직원 ㄱ씨는 가해자이자 자신의 직속 상사인 ㄴ씨의 폭언과 모욕적인 언행, 부당한 처우와 업무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목숨을 끊고 말앗습니다.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피해자의 직무를 연관성 없는 것으로 바꾼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뿐만이 아니에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직장 내 괴롭힘’을 검색하면 정말 많은 피해자들의 호소 게시물이 올라옵니다. 많은 직장인의 퇴사 이유 1순위, ‘사람 문제’. 이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 간의 문제인 만큼,‘괴롭힘’이 법적 처벌 대상으로 인정되려면 분명한 정황과 증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기준에 대해 나눠보려고 해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면
직장 내 괴롭힘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만연했을 테지만, 법적으로 처벌 기준이 제정된 시기는 2019년 7월 16일 이후예요. 괴롭힘이 처벌 기준으로 판단되려면 크게 세 가지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1) 회사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
2) 업무 상 적정 범위를 넘는 행위
3)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킴
위와 같은 기준을 입증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가해자와 나눈 대화 메세지라든지, 실제 업무 내용, 주변인들의 증언, 일기장 등을 바탕으로 증거를 모을 수 있어요.
✔️가해자와 나눈 대화 기록하기 사내 메신저나 카카오톡으로 부당한 업무 지시 등이 오간 경우에는 꼭 기록을 해서 모아두세요. 통화 기록을 캡처해두는 것도 좋습니다. 구술로 당한 폭언의 경우엔 괴롭힘을 당한 날짜와 장소, 폭언의 내용, 사건의 전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개인 기록이 필요합니다. 힘들겠지만 당시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도 기록해두세요. 지속적인 괴롭힘을 입증하려면 기록 역시 한두 건이 아닌 여러 날의 기록이 있어야겠죠.
✔️가해자와의 대화 녹음하기 대부분의 괴롭힘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와 단 둘이 있을 때에 말이죠. 빈번한 괴롭힘이 이뤄지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녹음기를 켜두길 권장합니다.
✔️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 요청하기 내 어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어쩌면 동료들일 겁니다. 평소 본인이 상사로부터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본 것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하세요. 또 가족들의 증언도 모아두면 좋습니다. 괴롭힘을 당하기 전과 후에 달라진 본인의 상태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가족일 테니까요. 물론 친구들의 증언도 괜찮습니다.
✔️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과 진료 기록 괴롭힘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주치의에게 알리고 진료 기록에 구체적인 내용이 적시되면 이 부분도 증거로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부당 대우를 당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부족구나, 내가 못나서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죠. 나에게 피드백을 주는 이의 태도로 인해 위축되고, 자꾸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관계는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오해 받았다면
그런데 일을 하는 관계에서는 당연히 마찰과 오해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늘 서로 좋은 이야기와 피드백만 주고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다보니 내 의도와는 달리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실제로 날선 피드백을 괴롭힘으로 오해 받아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또 한 직원을 끌어내리기 위한 내부 공모를 통한 신고도 있고요.
▲3분 15초부터 확인해보세요.
불미스러운 일로 조사를 받게 되면 당연히 당황스러울 거예요. 감정이 상해 “그게 무슨 괴롭힘이냐!”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오해를 풀고자 제 3자에게 신고자의 태도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게 대응하지 말 것을 권합니다. 대신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라고 말해요. 피신고자에게도 방어권이 있거든요. 본인이 신고자에게 한 말, 갈등의 배경과 결과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그 일련의 과정이 설득력이 있다면 합당한 피드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고자 입장에선, 피신고자의 징계나 처벌을 바라기보다 공식적인 사과나 부서 분리와 같은 조치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신고의 내용 대로 자신이 한 말이 맞거나 신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신고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의도와 다르게 상처를 줘 죄송하다’고 사과하면 원만한 해결을 이룰 수 있어요.
우리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벌어졌다면
지난해에는 회사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행세한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사업장 대표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나왔습니다. 정황을 면밀히 조사해 직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대표가 사건을 방관했다는 점에 처벌 이유를 둔 것이죠. 이 사례는 직접적인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 뿐만 아니라 사건을 방치하는 방관자에게도 명백한 죄가 있음을 보여줬어요. 구성원들의 갈등을 조율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일은 마땅히 회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일은 당연히 어려워요. 하지만 몇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항들은 있습니다.
✔️ 모든 대응은 신고자 보호에서 시작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내 괴롭힘 방지 법이 악용되는 사례도 있어요. 자신의 문제를 지적한 팀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괴롭힘 가해자로 매도하는 경우처럼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법’의 취지상 신고자는 특별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위 영상의 사례처럼요. 단, 신고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허위 신고의 가능성 혹은 개인의 성격 차이에 따른 오해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둬야 합니다.
✔️ 상습적인 가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많은 가해자의 경우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위협과 해를 끼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고 상식적이며, 피해자가 예민한 것이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피해자의 신고가 정당하고, 여러 구성원의 증언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살펴보세요. 그렇다면 그 가해자의 행동은 한 사람에게만 피해를 끼치지 않았을 겁니다. 상습적인 가해자일 확률이 높아요. 신고 범위를 넘어서 이제까지 있었던 괴롭힘 사건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징계의 범위도 그에 따라 달라져야 할 테고요.
✔️ 절차를 공정하게 진행하는 데 각별히 신경 쓴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증거로 제공되는 건 대부분 진술일 겁니다. 신고 당사자의 진술, 동료 직원의 진술. 그런데 사람의 말은 왜곡과 오해가 섞이기 마련이에요. 진술이 오가는 상황에서 신고 범위를 넘어 조직의 분열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쪽에게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 편파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고요. 사건을 조사할 때는 아래의 내용을 놓치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해요.
- 진술만으로 사건 입증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피해자 의견 청취 절차 거르기
- 피해자 보호를 위해 가해자가 자기의 행위를 설명할 기회 주지 않기
- 조사 효율성과 일을 크게 벌이지 않기 위해 신고자의 동료 직원 면담 생략하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든 갈등이 그렇지만, 어느 쪽이 잘못했느냐 판단하는 건 주관적인 영역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요. 물론 누가 봐도 가해의 영역이 분명한 건 예외이지만요. 구성원들의 화합과 연대를 고민하는 인사담당자로서 사건을 명확히 바라보고 다른 구성원을 납득시키는 일은 참 어려울 겁니다. 때로는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겪지 않아도 될 비난을 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여러분의 일이 어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