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은 메인프레임 시장 점유율 70%로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PC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핵심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70개가 넘는 사업부가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였고, 중요한 결정 하나에도 수십 명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1993년, 3년 연속 적자로 파산 직전까지 몰린 IBM에 루 거스너가 투입됩니다.
그는 조직 개편이나 제도 혁신 대신 먼저 문화를 바꿨습니다. “조직문화는 경영의 승부처 중 하나가 아니라 승부 그 자체다”라는 그의 선언은 이후 경영학의 고전이 됩니다.
이 통찰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조직문화는 구성원의 역량 발현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입니다. 문화가 건강하면 구성원은 스스로 움직이고 협력하며 성장합니다. 반대로 문화가 경직되면 아무리 훌륭한 전략과 제도가 있어도 실행이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조직의 모든 성과는 문화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은 어떤 조직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조직문화는 단순히 일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구성원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그리고 관계의 방식까지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고 조직을 성장시키는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 조직문화는 제도가 아니다
많은 기업이 조직문화와 제도를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조직문화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제도부터 설계합니다. 복리후생을 늘리고, 평가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하지요. 조직이 일정한 방향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겉으로는 합리적인 접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도는 일정 수준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 통제의 결과일 뿐입니다. 구성원이 스스로 몰입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이끌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제도가 많아질수록 구성원은 그것을 통제와 감시의 신호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스스로 움직이기보다 지시에 반응하는 존재로 머물게 되는 것이죠.
작은 아이디어를 내거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때조차 여러 번의 검토와 승인을 거쳐야 한다면 어떨까요?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될 것이고, 더 심각한 것은 그 과정이 구성원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메시지로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구성원은 책임보다 지시를, 도전보다 안전을 선택하게 됩니다. 촘촘한 제도가 오히려 자율성과 자발성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도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제도의 존재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제도는 통제의 틀이 아니라 구성원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스스로 움직이도록 도와야 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제도나 체계를 도입할 때마다 그것이 구성원의 자주성, 자발성,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인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조직문화라고 지칭하는 각종 제도는 문화의 본질이 아닙니다. 문화의 핵심은 구성원 간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고유한 질서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제도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상호작용을 어떻게 활용하여, 어떤 과정으로 조직에 적합한 조직문화를 자리잡게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 조직문화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조직문화는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관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패턴과 질서가 형성됩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사이의 수많은 상호작용이 얽히고 쌓이면서 조직만의 고유한 문화가 만들어지지요.
그렇다면 이런 상호작용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질서로 발전할까요?
하늘에 수만 마리의 새가 군집을 이루어 어딘가로 날아가는 모습을 떠올려보겠습니다. 무질서하고 제 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굉장히 질서정연합니다. 특정한 패턴, 일정한 간격, 고정된 위치를 유지하며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지요. 바닷속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 지어 헤엄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개별적인 행동이 모여 집단적 패턴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복잡계(Complex System)’라고 부릅니다. 복잡계는 단순히 ‘복잡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각 구성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시스템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복잡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라고 하지요.
기업 조직 역시 대표적인 복잡적응계입니다. 조직은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수많은 구성원이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시스템이지요. 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행동 패턴이나 가치관의 변화, 즉 ‘창발(Emergence)’이 바로 조직문화의 실체입니다.

조직문화의 핵심은 ‘상호작용’입니다. 조직 내의 모든 관계, 대화, 피드백, 의사결정, 협업 방식 등이 곧 상호작용의 형태입니다. 상호작용이 신뢰를 기반으로,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협력과 몰입이 촉진됩니다. 반대로 불신과 불안이 확산되어 부정적 상호작용이 늘어나면 구성원들은 방어적으로 행동하며 지시만 따르게 됩니다. 같은 제도, 같은 전략이라도 어떤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조직의 문화와 성과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납니다.
▶️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5단계
조직문화가 상호작용의 결과라면, 좋은 문화를 만드는 일은 좋은 상호작용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즉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협력하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상호작용을 설계한다고 해서 바로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계획대로 구현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와 경험이 쌓이면서 서서히 형성되는 유기적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은 어떤 과정을 거쳐 문화가 될까요? 개인과 개인, 팀과 팀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상호작용은 처음에는 무질서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시 새로운 행동을 촉발합니다. 이런 반복 속에서 ‘이 조직에서는 이렇게 일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창발되는 과정입니다.
이 창발 과정은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조직활성화, 자기조직화, 조직동기화, 조직공진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새로운 조직문화가 형성됩니다.

✅조직활성화
조직문화 형성의 첫 단추는 조직활성화입니다. 조직 환경과 구성원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이 될 ‘킹핀(kingpin)’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상호작용을 촉진하며,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 변화의 에너지를 형성해야 하는 킹핀은 리더일 수도 있고, 혹은 그보다 더 영향력이 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킹핀을 활용해 신뢰를 얻고 소통하며 변화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자기조직화
그다음에는 ‘자기조직화’가 일어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자기조직화란, 구성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각 개체들이 자발적으로 질서와 패턴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전 단계에서 형성된 변화 에너지는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촉진하며 개인의 몰입으로 연결하고, 또 이를 강화합니다. 구성원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질서가 바로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진 문화입니다.
✅조직동기화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지면, 구성원 개개인이 성공경험을 반복하고 이를 조직과 공유하며 조직과의 동일시가 강화됩니다. 이를 ‘조직동기화’라고 합니다. 성공경험이 누적되면 조직의 목표가 개인의 목표로 자연스럽게 내면화됩니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성취가 조직의 성장과 연결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성과중심적 사고가 조직 전체로 확산됩니다.
✅조직공진화
다음으로 단위 조직이 성과와 성공경험을 공유하며 상승작용과 시너지를 만드는 ‘조직공진화’ 단계로 이어집니다. 조직 내부에서는 협력과 선의의 경쟁이 촉진되며, 타인의 성취가 또 다른 성장의 동력이 되는 선순환이 형성되지요. 행동하는 주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 긍정적으로 지속될 때 조직공진화가 일어납니다. 조직의 상호작용을 가속화하여 공진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경쟁과 협력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문화 창발
앞의 네 단계를 거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조직문화가 창발됩니다. 조직은 더 이상 외부에서 정해진 규율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구성원들의 자주성, 자발성, 자율성을 기반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문화를 갖게 되지요.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며 협력하는 환경을 만듭니다. 변화가 전 조직에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조직문화로 정착하게 됩니다.
▶️ 긍정적 상호작용의 기반을 설계하라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조직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조직문화와 좋은 조직문화를 가르는 것은 ‘어떤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는가’입니다. 몰입과 신뢰를 이끄는 긍정적 상호작용은 문화를 성장시키지만, 불안과 불신을 낳는 부정적 상호작용은 문화를 병들게 합니다.
HR이 해야 할 일은 이 다섯 단계를 형식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각 단계에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몰입과 신뢰로 이어질지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핵심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불확실성을 줄이고, 긍정적 기대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긍정적 기대감이란 ‘이 조직에서 성장할 수 있고, 공정하게 평가받을 것이며, 내 노력이 결국 보상받을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결과가 연결된다는 확신이 협력을 이끌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반대로 부정적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부정적 불확실성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는 인식입니다. 이런 인식이 자리 잡으면 심리적 안전감이 무너지고, 행동의 기준이 ‘의미’가 아니라 ‘위험 회피’로 옮겨갑니다. 실수보다 비난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방어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HR은 어떻게 긍정적 기대감이 높은 환경을 설계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첫째, 공평한 기회를 보장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2️⃣둘째,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고, 그것이 조직의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구성원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3️⃣셋째, 보상과 평가를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운영해야 합니다. 노력과 성과가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일관되게 지켜질 때 구성원은 조직을 신뢰하고, 그 신뢰가 긍정적 상호작용의 토양이 됩니다. 반대로 불공평한 기회, 불투명한 과정, 불공정한 보상이 반복되면 부정적 상호작용이 일상화됩니다.
결국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매일의 상호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의 질은 구성원이 조직을 신뢰하며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